어바웃블랭크가 동면에 들어갑니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마지막으로 소식을 전한지 벌써 2년이 넘었네요. 오늘은 어바웃블랭크가 기약없는 동면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새로운 포스트를 씁니다.
어바웃블랭크는 2009년 100% 디자인 런던을 시작으로, 2011년 코펜하겐 디자인 위크, 2012년 헬싱키 하비따레까지 총 3개의 제품 라인을 출시했고, 세계 11개국 26개 온/오프라인 소매점을 통해 고객들을 만나왔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출시하진 않았지만, 오레고 가구와 확장이 가능한 책꽂이를, 요한나 굴릭센과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면 재질의 노트 커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디자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서 자신들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고, 그 제품을 세계 여러 곳에 보내 판매하고,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어바웃블랭크를 통해 제품을 만드는 일을 잠시 멈추고, 당분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배경에는 아래와 같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제품을 만들고 유통하는 일은 부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승훈은 현재 모바일 마케팅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의 디자인마케팅 실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승호는 핀란드 알토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진행하며 수업을 개설해 석사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소은은 신혼 초 헬싱키를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첫, 헬싱키‘라는 책을 내어 놓았고, 디자인DB에 핀란드 소식을 전하던 현선은 핀란드에서 10년 넘게 살아온 개인적인 경험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한 작업을 준비해 왔습니다.
사실 이는 새로운 변화는 아닙니다. 어바웃블랭크의 핵심 멤버들은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각자 직업을 가진 채 개인의 여가시간을 할애해 지금의 어바웃블랭크를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승훈과 소은은 2013년부터, 승호와 현선은 2014부터, 결국 우리 넷 모두 엄마, 아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용한 물건을 만들면 자연히 찾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만 소량으로 제품을 공급하면서 작은 스케일을 유지하자는 처음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물건을 디자인하고, 공장을 찾아 주문하고, 포장을 고민하고, 불량인 제품을 확인하는 것까지, 소위 ‘작은 사업’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작은 까페를 열고 싶어’라고 다소 쉽게 말하는 것 처럼, 우리는 물건을 만들어 유통하고 판매하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죠.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 아빠가 되어주고, 각자 맡은바 책임을 다하면서 동시에 어바웃블랭크를 운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둘째로, 물건을 만들어 유통하는 일은 어느 정도의 규모에 도달해야 지속 가능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바웃블랭크가 다른 몇몇 제조사와 달랐던 점은 아마 (1)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2) 최상의 품질로, (3) 소량으로 생산해 판매한다는 점이었을 것입니다. 어바웃블랭크를 시작하던 2008년 한국에는 우리가 원하는 품질을 생산할 수 있는 인쇄/제본 업체가 없었고, 결국 일본에서 제조 파트너를 찾아 노트를 출시했습니다. 2011년 출시한 스탠드와 접이식 의자는 핀란드의 다른 두 도시에서 생산했습니다.
아마 일본과 핀란드는 현재 시점에 각각 노트와 가구를 생산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편에 속하는 나라들일 것입니다. 높은 생산 원가로 도매가 어려웠던 우리는 소매점과 직접 소통하고, 직접 온라인 스토어를 열어 유통 마진을 줄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마진율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결국 저희 넷의 업무량을 크게 올려 놓으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위에 언급된 전시들에서 만난 다른 제조사들의 조언처럼 노트의 제조를 한국이나 중국으로, 가구들의 제조를 폴란드로 옮겼으면 수익도 늘어나고, 도매를 통해 업무량도 크게 줄일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어바웃블랭크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것도 조금 더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처음의 의도와 크게 달라지는 것 같아 고민이 컸고, 또 그러기 위해선 일정량의 투자를 유치하고 회사를 키워야 하는데 그 책임을 맡아 진행을 하기엔 우리 넷 중 누구도 지금 열정을 가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포기하기 어려웠습니다.
셋째로, 기존의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새로운 물건을 소개하고 판매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처음 어바웃블랭크를 시작했을 때는 우리 역시 왜 수많은 회사들이 매년 새로운 가구를 출시하거나, 적어도 굳이 새로운 색상을 입힌 오래된 제품을 페어에 출품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때 11개국 26개의 온/오프라인 소매점을 통해 고객을 만나온 어바웃블랭크가 수년간 서서히 대부분의 소매점과 연락이 끊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제품을 취급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세계의 많은 소위 ‘디자인 숍’들은 늘 새로운 제품을 소개해야 하는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즉, 새로운 제품을 꾸준히 빠르게 소개하는 것이 작은 소매점이 대형 마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력 중 하나였던 것이죠. 또, 이렇게 꾸준히 노력을 해도 많은 작은 숍들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문을 닫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제품을 꾸준히 페어에서 소개하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판매처를 찾는 것은 좋은 물건을 만드는 일 만큼이나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형태로 운영되어 온 어바웃블랭크는 새로운 제품을 소개하고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는 속도가 사업 초기 찾았던 소매점들과의 거래가 끊기는 속도를 쫓아가지 못했습니다.
어바웃블랭크 초기 조금은 더 유동적인 업무조건을 가진 직장에서 일했던 우리는 여행을 겸한 여러번의 출장을 통해 흥미로운 소매점들을 직접 만나고, 우리 제품을 다양한 시장에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상황들이 변하면서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또, 새로운 제품을 소개한다는 것은 제품을 만들기 위한 디자인, 프로토타이핑, 그리고 전시를 위한 지출을 의미합니다. 이는 어바웃블랭크 뿐 아니라 우리가 다양한 페어에서 만났던 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가지고 있던 딜레마였습니다. 물건이 잘 팔리고 이름이 알려지고 있어도 수익은 모두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소개하는데 사용되는 것이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몇몇 제조사가 그렇듯 직접 공장을 차리고 온라인 숍을 운영하며 유통마진을 최소화하거나, 혹은 대부분의 다른 제조사들의 뒤를 따라 제조처를 일본과 핀란드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고 유통의 스케일을 키우는 것 외에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바웃블랭크는 동면에 들어갑니다. 우리의 작은 경험이 혹 자신의 제품을 직접 만들어 유통하려고 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 짧게 적어도 될 소식을 길게 전합니다. 물론 이는 네명의 디자이너가 지난 수년간 부업으로 제조업을 경험한 아주 편향적인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왜 굳이 그렇게 많은 공을 들였던 사업을 동면에 넣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설명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점을 감안하고 글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당분간은 이 포스트가 저희 블로그에 마지막 포스트가 되겠네요. 언젠가 우리중 한명이 투자자를 찾고 새로운 어바웃블랭크를 소개하기 위해 나타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2016년 3월 31일
승훈, 승호, 현선, 소은